[코칭 레볼루션 1] 마음을 보듬는 코칭

아들만 바라보신 어머니의 췌장암 소식. 다른 암과 달리 췌장암은 생존율도 낮다. 칠순 어머니의 몸은 의료진에 맡기고,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코칭으로 케어하기로 했다. 네 시간 반 동안 울고 웃던 어머니. 코칭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힘이 있었다.

‘어머니 췌장암이래.’ 전화기로 들리는 아내의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급한 호흡을 참는 게 느껴졌다.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내도 답을 당장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린 약속이나 한 듯 짧지만 침묵으로 채웠다. 췌장암은 생존율이 낮아 침묵은 무거웠다. 언제부턴가 내게 어머니는 늘 ‘아프다고 하는 분’이었다. 나는 늘 같은 답만 했다. 병원에 가보시라고. 칠십대 중반을 넘으니 더 잦아졌다. 바쁜 업무를 핑계로 나의 같은 대답도 반복횟수가 늘었다. 며칠 전 어머니는 배가 아프다고 하셨고, 나는 또 병원에 가보시라고 했었다.

어머니에게 나는 최고의 자랑거리였다. 늘 최 상위권에 있던 성적은 어머니의 기쁨이었다. 별다른 취미도, 친구도 없는 어머니의 유일한 기쁨은 나였다. 넉넉지 못한 가세로 맞벌이를 하셨던 어머니의 퇴근 모습은 늘 피곤에 눌려있었다. 하지만 나를 보시는 표정은 늘 같았다. 흐뭇한 웃음. 그것은 괜찮다.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억지웃음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그 모습이다. 올해 일흔 일곱. 남들은 노인이라고 하지만 내겐 따뜻한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를 했다. 빠듯한 살림에 아버지는 인문계 진학 대신 공업고등학교 진학을 권하셨다. 난 싫었다. 울며 대학에 갈 거라고 우겼었는데, 결국 재수를 하게 된 것이다. 그해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이 왔다. 종합 반에서 폭우로 수업을 조기 종료한다고 했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차창을 때리는 비는 거셌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즈음, 버스 기사는 비가 많이 와서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내리라고 했다. 우산으로 비를 막으며 골목을 돌았다. 비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막막했다. 우리집은 반 지하였다. 무릎 위로 오른 물을 차며 집에 왔다. 문은 열려 있었고, 집은 흥건했다. 몇몇 사람들이 가재도구를 윗층 주인집으로 옮기고 있었다. 부엌에 계시던 어머니는 나를 보시고 말없이 안으셨다. 어머니의 떨리는 가슴. 그 떨림은 참았던 눈물을 삼키는 것이었다. 나도 짐을 옮겼다. 나를 본 집주인 아주머니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신다. “엄마가 가장 먼저 네 책을 옮기셨어,,,”

대학을 졸업하기 전, 잡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기자’라고 적힌 명함 위에 어머니의 한참 머물렀다. 어머니를 위해 큰일을 했구나! 라는 흐뭇함에 나도 좋았다. 기자 생활은 고되고 시간은 늘 부족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직장은 서울, 집은 안산. 일하는 게 좋았다. 늘 야근에 먼 거리 출퇴근이 힘들어 회사 옆에 방을 얻었다. 가족과도, 부모님과도 멀어졌다. 주말에 집에 가면, 혼수상태처럼 잠만 잤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일이었다. 방을 얻어 산 게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대학을 가면 아이들에게 아빠의 존재가 없어질 것 같았다. 연로하신 부모님에게도 아들의 자리가 없었다. 결국 퇴사하고, 독립했다.

퇴사 즈음, 블루밍경영연구소에서 코칭을 배웠다. 경청, 인정과 칭찬, 질문…. 익숙해서 등한시했던, 그래서 이 단어들의 깊이를 알고 난 충격은 컸다. 직장 생활을 하며 많은 강의를 들었지만 이렇게 파워풀하지는 않았다. 코칭은 마흔 중반,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방점을 찍었다. 사람을 바꾸고, 기업을 바꾸고, 인생 전체를 바꾸는 코칭의 힘은 한마디로 소름이 돋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서울대병원 암병원 6층에 입원했다. 처음 경험하는 항암 치료는 어머니는 물론 가족 모두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어머니의 암 완치를 경험했던 선배는 “전념해야 암치료가 가능하다”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여동생과 번갈아 간병을 했다. 일을 서둘러 마치고 병원으로 향했다. 여동생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항암제가 투여가 반복되고,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어머니의 마음 케어가 중요한데 왜 그러냐고. 병실로 들어가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이 약을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지는 게 정상이래요. 제대로 효과가 발휘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그렇다. 몸은 우리나라 최고의 의료진에게 맡기고 난 어머니의 마음을 케어 해야 하는 것이다.

5월 1일.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라 어머니와 종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암 병원 6층에는 꽃들로 가꿔진 작은 정원이 있고, 창경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도 선선했다. 코칭을 배우면서 나 자신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을 경험했다. “어머니 저 참 열심히 살죠?” 어머니는 웃으셨다. “그래. 몸 상할까봐 걱정이지.” 제가 살아온 시간을 이야기하며 일만하는 우직한 소처럼 살았는데, 앞으로는 바다 깊숙이 사는 동물까지 찾아다니며 코칭으로 케어하는 고래처럼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지난 삶과 앞으로의 삶을 동물에 비유해 보자고 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생각하셨다. “병아리, 이런 봄날 마당을 뛰어다니는 병아리.” 어머니의 어린 시절은 병아리 같았다고 했다. 막내로 오빠들과 언니들에게 사랑 받았던 시절.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장에 갔던 아버지가 사다주신 흰 고무신이 닮을까 막내는 마늘을 잘라 비비며 광을 내고 들고 넣고 다녔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위해 또 한 켤레를 사다주셨다. 오빠들은 막내를 늘 업고 다녔다. 서울로 유학 갔던 오빠는 막내 동생의 선물부터 챙겼다. 서울로 일하러 간 큰 오빠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기차표 없이 집에 오는 기차를 탔다가 걸려 일본 직원에게 맞아 머리에 붕대를 감고 집에 왔지만, 막내에게 줄 숨겨둔 꽃신을 가방에서 꺼내며 환한 웃음도 함께 건넸다.

결혼 후, 어머니는 새장의 새라고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급격히 가세가 기울며 결혼 전까지 살아왔던 삶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했다. 쳇바퀴 돌 듯 집과 직장을 오가며 자신의 시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앞으로 하늘을 훨훨 나는 새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어머니의 눈은 구름 한점 없는 오월의 하늘에 머물렀다. 얼추 네 시간 반.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더듬었다. 주름진 얼굴에 모처럼 화사한 웃음이 피더니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셨고, 눈가에 고인 눈물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오후가 되며 바람이 쌀쌀해졌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맑고 투명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일, 아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일까지 어머니는 모두 토하듯 말씀하셨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나니 막힌 체증이 다 해소된 얼굴이었다.

나와 어머니.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보다 내가 더 어머니를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어머니를 반도 몰랐었다. 분가하며 바쁜 직장 생활로 멀어진 거리. 그 거리가 얼마나 큰지도 알았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다시 품은 듯, 그런 행복한 표정으로 눈물을 닦으며 나를 보셨다. “후련하구나….우리 아들한테 별꼴 다 보였네.”

항암 3차를 마친 후 암 세포가 3분의 1로 줄었다. 그렇게 세 번을 더 한 후 9월 11일 제거 수술을 했다. 깔끔하게 잘 되었다. 수술 후 찾아온 섬망증은 딸에게 “아가씨는 몇 살이야?”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의 현실 감각을 앗아갔다. 하지만 나만 보면 여전히 웃으며 손을 잡으셨다. “승영아, 아픈 데는 없어?.” 퇴원 후 어머니는 건강과 안정을 되찾으셨다. 4월부터 시작된 수개월. 내 인생을 통틀어 참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닫는 시간이었다. 몸을 위한 치료는 내가 못할지언정,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보듬어드리리라. 그리고 코칭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나의 느낀 점을 전하리라. 나를 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글쓴이 최승영

프로필 현재 블루밍경영연구소 파트너 코치(KPC), 커뮤니케이션 컴퍼니 ‘에이컴’의 대표

대학교 4학년 때 웅진출판 잡지기자 공채 1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월간지 <My Wedding>와 <madame Figaro>의 기자, <DOVE>와 <style H>편집장 및 디자인하우스 전략출판본부장으로 근무했다. 강의와 일상생활은 물론 월간지 <베테랑>에도 코칭을 접목하고 있다.